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5세 (문단 편집) == 30년 전쟁 발발과 보헤미아 국왕 즉위 == 1619년 3월 20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마티아스(신성 로마 제국)|마티아스]]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마티아스의 사촌동생이었던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가 [[합스부르크 제국|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상속받게 되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수회]] 교육을 받아 골수 가톨릭 신자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 중에서도 오래전 [[후스 전쟁]]까지 겪어 가톨릭 신자가 별로 없던 보헤미아 왕국 귀족들은 페르디난트가 즉위하면 극도의 탄압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제국의 개신교를 대표하는 유력 제후 중 하나였던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제안했다. 당시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나 장인 제임스 1세 등 유력 군주들은 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경고했으나 혈기왕성하고 패기만 앞섰던 프리드리히 5세는 별 고민 없이 이를 수락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페르디난트의 분노를 불러왔고, 프리드리히 5세는 페르디난트의 황제 선출을 막기 위해 요한 게오르크 1세와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 친척인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바이에른)|막시밀리안 1세]] 등을 설득했으나 모두 거절당해 결국 본인조차 페르디난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하고 말았다.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2세는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자진 포기하지 않으면 제국 추방령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프리드리히 5세는 이를 거부하여 [[30년 전쟁]]의 1막인 보헤미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 국왕으로서 어떠한 비전도 없었고 아내 엘리자베스와 함께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기 바빴다. 게다가 후스주의 성향이 강한 보헤미아에서도 칼뱅파 신자로서 귀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동맹이자 물주인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지원을 받은 페르디난트 2세는 프리드리히 5세를 압박했고 결국 1620년 빌라호라 전투에서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틸리 백작]]에게 패한 프리드리히 5세는 외가인 네덜란드로 도망쳤다. 그러나 팔츠 선제후국은 [[황제군]]에게 짓밟혔고 결국 1623년 팔츠 선제후국과 팔츠 선제후 지위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어갔다. 심지어 막시밀리안 1세는 페르디난트 2세의 도움을 받아 1628년 [[오버팔츠]]를 빼앗아 병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